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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도 똑똑해야 될 수 있다서평 2019. 9. 22. 22:06
명절이 되면 찾아가는 할머니 댁에서 우리는 늘 뜻하지 않은 고행을 겪는다. 오랜만에 찾아간 손녀, 손자가 예뻐죽는 할머니는 부엌에서 쉴 새 없이 먹을 것들을 내오신다. 밥은 한 공기로 끝난 적이 없고 반찬이 끊이질 않으며 겨우 다 먹고 나면 식혜며, 과일이며 계속 먹을 것을 내어주신다. 평소보다 3배는 과식을 하고 있지만 할머니는 왜 이렇게 못 먹냐며 자꼬 더 먹으라고 음식들을 권하신다.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할머니의 맘은 감사하지만, 우리 수혜자들은 꼭 다음날 체하기 마련이다.
"어치케, 한 그릇 더 줘어~?"할머니가 손녀 마음을 알아주셨더라면 음식도 조금 하시고 체하지도 않았을 거라 아쉬운 마음이다. 하지만 역할이 바뀌어 우리가 누군가에게 나눠주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우리는 할머니와 똑같이 행동한다. 나누고, 돕고 싶은 마음만 앞서 수혜자의 필요와는 상관없이 내가 주고 싶은 것을 줘버리기 마련이다. 친구에게 선물을 줄 때도, 단체에 기부를 할 때도.
할머니의 손녀 사랑을 다른 것과 비교할 순 없지만, 누군가를 위한 마음이 의도대로 전달되기를 바란다면 받는 사람의 입장을 헤아려야 함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기왕 누군가를 돕기로 마음먹었다면 좀 더 도움이 절실한 사람을 돕는 게 좋지 않을까? 똑같은 비용이라면 좀 더 좋은 물건을 사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SNS 광고로 본 우울한 아이들의 사진, 텔레마케터가 들려주는 구구절절한 사연들, 길거리 캠페이너가 들려주는 극빈층의 삶.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에 마음이 동해 지갑을 열곤 하지만 실제로 내 돈이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각 단체에서 관련 홍보물과 결과보고서를 보내고 홈페이지에도 올리지만 잘 들여다보지 않게 된다. 알아서 잘 썼겠지.어쩌면 우리의 무관심이 '더 잘 쓰일 수 있던' 돈을 '덜 필요한 곳에 덜 효율적'으로 쓰이게 했을지 모른다. 조금만 더 신경 썼더라면 완전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었는데 덜 착하거나 오히려 피해를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잘 알아보지 않고 성과가 제대로 입증되지 않은 곳에 기부했다가는 오히려 해악을 끼칠 수도 있다. 어차피 내 돈 나가는 거 좀 더 잘 쓰이는 게 좋을 텐데 필요한 물건을 살 때 요목조목 따져보는 것과는 상반되는 태도로 기부를 한다. 착한 일이 다 좋은 게 아니다. 숫자와 이성으로 냉정하게 그 효과를 파악해야 정말 필요한 곳에 제대로 도움을 줄 수 있다. 윌리엄 맥어스킬의 <냉정한 이타주의자>에서는 남을 제대로 돕기 위해서는 아래 5가지 사항을 꼼꼼히 체크해보길 권한다.
-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큰 혜택이 돌아가는가?
- 이것이 최선의 방법인가?
- 방치되고 있는 분야는 없는가?
-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 성공 가능성은 어느 정도이고 성공했을 때의 효과는 어느 정도인가?
위의 체크리스트는 이타적인 행동을 하기 전에 그 결과를 예상해보고 놓치는 것들이 없는지 점검할 수 있게 한다. 나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 것인지를 따져보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한정된 자원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한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기부할 수 있는 돈이 딱 만 원이 있는데 기부처는 두 곳이라고 치자. 지자체 지원이 부족해 방학 중 급식 지원이 필요한 아이들과 아프리카에 식량이 부족해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을 도울 수 있다. 당신이라면 어디에 기부할 것인가? 아프리카 어디에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를 도울 바에야 우리나라 아이를 돕겠다고 생각했는가? 기부하기 버튼을 누르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해보길 권한다.
일단 만 원이면 우리나라 아이들의 한 끼를 해결하는데 4,000원 정도가 들지만 아프리카에서는 300원이면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 또 대한민국은 국가 자금력이 충분하지만 아프리카는 우리의 기부금이 없다면 다른 지원을 기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같은 돈으로 더 많은 아이의 식사를 책임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 다시, 어디에 기부하는 게 좋을까?우리는 선행을 하면서 '착한 일 했다'는 것에서 생각을 멈춘다. 하지만 우리가 한 일이 정말 '착한 일'이 되려면 우리의 선행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쉬운 예로 '공정무역' 상품 구매를 들 수 있다. 요즘은 여기저기서 '공정무역' 상품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생산자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하지만 이타적인 행동에도 냉정한 판단이 필요하다고 말한 윌리엄 맥어스킬은 차라리 비공정무역 상품을 구매하는 것이 그들을 도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고 차액을 기부하는 것이 그들을 돕는 일이라고 말한다. 소비습관을 바꾸는 건 여타 방법들보다 세상을 바꾸는 데 그다지 효과가 없다고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공정한 무역을 위해 우리가 상품에 추가로 지불하는 비용의 약 8%의 극소액만이 생산자에게 돌아간다. 즉 공정무역 상품 소비로 극빈층의 생활을 개선하는데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공정무역 제품을 계속 구매할 것이다. 어차피 나는 계속 커피를 마실 건데 기왕이면 공정무역에 조금이라도 신경 쓴 제품을 선택하고 싶다. 요즘은 제품 비용 차이도 거의 나지 않는다. 또 하나 중요한 문제는 공정무역 상품을 계속 소비하고 극빈층의 생산자 문제에 소비자가 신경 쓰고 있음을 인지시키는 것이 사회와 기업을 각성시킬 수 있다. 소비자들의 개념 있는 선택들이 좋은 생태계를 만들고 더 많은 사람의 인식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공정무역 단체들에 좀 더 투명한 비용처리와 처우 관리를 지속해서 요구하면서 말이다. 이런 활동이 지속하여야 생산자들의 삶을 지속 가능한 자립의 상태로 끌어올리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는 기부에 대한 인식이 폭넓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기부문화가 아직 제대로 확산하지 않았고 관심도 부족하다. 그래서 일단 생활 속에서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여러 프로젝트가 더 필요하다. 일단 '남을 돕는 행위'를 익숙해진 뒤 그 효율성을 따져야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최근 카카오에서 시작한 '프로젝트 100'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글쓰기, 걷기, 물건 모으기 같이 평소 기르고 싶은 습관을 미션으로 선정해서 100일 동안 도전하는 기부프로그램이다. 보증금으로 10만 원을 걸고 미션을 성공한 만큼 돌려받고, 실패한 만큼 기부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이런 프로젝트가 활성화되면 수혜자에 대한 관심은 우선될 수 없어도 '기부'라는 이타적 행위에 거부감은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 지금 적은 돈이라도 기부를 하는 기부처 홈페이지 자료를 찾아보길 권한다. (요즘 기부금 관련 법으로 모두 자료를 공개하게 되어있다) 내가 기부한 곳이 얼마나 투명한지 사업이 비용대비 효율이 높은지, 사업에 실효성이 검증되었는지, 단체의 사업 실행력은 어느 정도인지, 또 추가 재원이 필요한지를 따져보는 것이다. 조금 피곤한 일이지만 이런 관심이 무관심한 기부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데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두둑한 지갑을 위해 현명한 소비자가 되어야 하듯, 따뜻한 세상을 위해 현명한 기부자의 삶도 시작하길 바란다.
이 글은 체인지그라운드에서 운영하는 독서모임 '씽큐베이션' 2기에 참여해
윌리엄 맥어스킬 저 <냉정한 이타주의자>를 읽고 쓴 12번째 서평입니다.'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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