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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저 그들보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서평 2019. 4. 24. 14:28
“나는 그저 운이 좋아 아직 살아있을 뿐 입니다.
다음은 제가, 여러분이 될 수 있어요.”나는 몇 년 전 있었던 '강남역 살인사건'을 기억한다. 그 사건을 떠올리면 아직도 간담이 서늘하다. 2016년에 있었던 이 사건은 '평소 여성들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한 한 남성이 20대 여성을 무참히 살해한 일이었다. 당시 그 일을 두고 남녀를 나눠 '여성 혐오 사건이다, 아니다'로 갑론을박했지만 3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수많은 여성은 집 밖 화장실 갈 때마다 온몸에 촉각을 세우며 긴장한다. 나처럼. 모두가 그때 그저 운이 좋아, 그 시간에, 그 화장실에 가지 않았을 뿐, 언제 같은 일을 겪을지 모를 일이다.
사건 이후 한동안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피해자 추모 물결이 일었다. '여성 혐오'에 공감한 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정신병을 앓고 있던 피의자의 병력을 들어 많은 이들이 '진짜 원인'을 부정했다. 당시 검찰도 여성혐오 사건이 아니는 결론을 내렸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서천석 정신건강의학 전문의는 자신의 SNS를 통해 “정신병의 증상은 사회적 맥락속에 있다”고 했다. 서 소장은 “그(피의자)가 ‘여성들이 나를 무시해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은 사회적 맥락을 갖고 있고, 그것은 ‘여성 혐오’”라며 “이것이 그의 망상이라고 하더라도 그 망상은 ‘여성 혐오’라는 사회적 맥락을 반영한다. 만약 우리 사회가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고 여자가 남자를 무시하는 것이 남자가 남자를 무시하는 것에 비해서 더 기분 나쁜 상황이 아니라면 그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그 사건의 진짜 원인은 약자를 대하는 사회적 맥락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었다.
한 사회에서 일어난 아픔과 고통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의 저자 김승섭 님은 공동체의 사회적 환경은 역사 속에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토대 위에서 형성된다고 설명한다. 인간의 질병에는 유전적 요소와 환경적 요소가 함께 작용하지만 우린 자주 이 사실을 잊어버린다. 개인에게만 원인을 돌리게 될 때 우리는 폭력적인 사회 조건을 모호하게 만들고, 고통의 유발 경로를 흐릿하게 할 뿐이다.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엮여있는 사회적 구조 안에서 그 고통의 원인을 해부하고 사회적 고통을 함께 치유하기 위한 시각이 필요한 것이다.
원인의 '진짜' 원인
며칠 전 세월호 참사 5주기가 있었다.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많은 이들이 '잊지않겠다'며 희생자들을 기억했고, 한쪽에서는 아직도 찾지 못한 책임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고백컨대 나도 세월호 참사를 단순 자연재해로 이해하던 때가 있었다. 지진처럼 어쩔 수 없었던 우연한 사고로 말이다. 시간이 흐르고 관련한 많은 사건과 보도들을 접하면서 관점이 달라졌지만, 과연 단순 자연재해였다고 해서 '안됐네'하며 넘겨야 하는 문제일까?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내 어깨를 잡고 사정없이 흔들며 '똑바로 다시 보라'고 말한다.
세월호 참사에 희생된 아이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선원의 말을 따랐고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상식을 지켰다'라는 이유로 죽었다. 또다시 배가 침몰했을 때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를 따를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수많은 언론에선 지난 5년 동안 누가 얼마나 잘못했고, 얼마나 무능했으며 유가족이 어떤 보상을 받았는지 열심히 보도했다. 일부는 5년이나 지난 일에 지나친 자원을 투입한다며 투덜거리기도 한다. 노란 리본을 매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차는 어르신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억되지 않은 참사는 반복되기 마련입니다.”마음 아픈 참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 고통을 초래한 사회적 원인을 파악하고 치료해야 한다.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회를 위해 밝혀내고, 기록하고,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사회구조적 문제를 공동체가 공유하고, 원인을 규명하고, 보상과 처벌을 해야 개인뿐만이 아니라 사회관계가 회복되고 문제가 되풀이되지 않는다. 그래서 시간이 지났다고 적당히 하다 멈출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그쳐서는 안된다. 공동체 구성원인 우리들은 책임이 없을까? 세월호 참사는 단순히 컨트롤타워가 없었고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점을 설명할 수 없다. 성급하게 진행된 치유 프로그램, 지역사회의 편견, 학교에서의 부정적 경험, 정치활동으로 이용하는 등 우리는 계속해서 유가족과 생존자들에게 상처를 입혔다. 한국 사회의 온갖 모순들이 집약된 구조적 폭력은 무시한 체 그들에게 남겨진 아픔과 트라우마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버렸다.
사회는 그들에게 '선량한 피해자'의 롤모델을 요구했다. 실제 치유에 도움이 되든, 그렇지 않든 지원해주는 모든 것들을 감사히 받으며 각자의 상처는 알아서 치유해가는 모습 말이다. 우리는 그들이 아픔을 치유하고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재난 당사자가 애도하고 치유에 집중하도록 사회가 침묵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를 우회하고도 안전한 대한민국을 기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는 앞으로의 내 미래이며,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미래이다. 진부한 이야기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의 몸과 정신이 사회적으로 서로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고받는지 알아야 한다. 그저 아프고 고통받는 이들을 동정하고 선의를 베푸는 차원이 아니다.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기 위해 그들을 살피고 공감하며 함께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한 순간 지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 꼰대 되지 맙시다
사람들은 가난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을 게으르고 무능하다고 말한다. 노력하지 않아서 가난한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진지하게 따져봐야 한다. 단지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벗어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꿈꿀 기회조차 없이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그 안에 있는 나는 얼마나 행복하고 안전할 수 있겠는가 하고 말이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읽은 우리는 적어도 '가난은 게으르다'라고 말하는 꼰대는 되지 말아야 한다.
책에는 사회 역학이란 관점으로 가난한 사람, 해고 노동자, 소방공무원, 성소수자, 인종차별 등 다양한 사례를 들어 우리들을 각성시킨다. 책에 다 다루지 못한 아픔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서로에게 무관심해지는 것이 미덕이 되고 있는 요즘 우리가 얼마나 병들어 가고 있는지 알아차려야 한다. 공동체와 개인은 유기적 관계이며, 개인이 아프면 공동체 모두가 아프다.
책에 기술된 김승섭 저자의 생각들과 직업 정신을 뛰어넘은 이타심에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아름다운 그물망 안에서 세상이 바뀌는 그 순간들을 계속 경험하고 싶은 것이 그의 진짜 동기라고 했다. 그런 자신을 지극히 이기적이라고 표현했지만 많은 이를 위로하고, 깨우치게 하는 그를 어떻게 자신의 이익만 꾀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책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나는 순간들로 가득했다. 그동안 개인에게 문제를 돌리고 외면했던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웠다. 앞으로 조금씩 국가의 역할과 공공 시스템의 범위, 그리고 그 한계에 대해 더 깊이 공부해야 할 것같다.
"갈등을 대하는 자세가 한 사회의 실력이다."
그들의 아픔을 '너'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감수성이 내가 행복하게 사는 길이다.'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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