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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말 제2의 IMF 사태가 일어날까?
    서평 2019. 5. 9. 22:07

    1997년 말, 대한민국은 온통 혼란과 충격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다. 나라가 정말 망할 수 있는 국가 부도 위기 상태에서 국제통화기금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였다. MF 사태로 11% 하던 금리가 25%까지 올라가며 내노라하던 대기업들이 줄줄이 부도가 났고 개인과 기업들 모두 처참히 무너졌다. 실직한 가장들과 파산한 기업, 자영업자들은 극단의 상황에 몰리며 사회 분위기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아픈 역사가 지나가고 20년이 훌쩍 지난 2019년, 일부 여론은 IMF 사태가 한국 사회를 또한번 강타할지 모른다는 이야기들이 돌고있다. 해외 시장이 휘청하며 한국 경제에 줄 치명타를 염려하며 1997년  IMF 사태 당시 부동산 가격이 지금의 가격을 비교하기도 하고, 10년 만에 찾아온 제조업의 위기로 한국경제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들이 많다.
    정말 우리나라에 제2의 IMF 사태가 찾아올까?

    대한민국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현재 재정 안정권에 들었고 현재 한국의 국민 총 생산량 GDP는 세계 12위까지 올랐다. 이렇게 잘 사는 우리나라가 정말 망할 수 있단 말인가? 그동안 우리나라가 성장해온 돈의 역사를 돌아보면 정말 제2의 IMF 사태를 걱정해야 하는지 집어보자.

    출처: 나무위키

    땅을 소유하게 된 농민들, 혁신의 시작

    한국 경제가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일본 철수 직후 미군이 들어와 토지 개혁을 하면서부터이다. 그동안 대규모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지주들은 소작제도를 운영하며 농민들이 거둔 수확량의 절반을 가져갔고 일제강점기에는 소작료가 80%를 넘기는 경우까지 있었다. 열심히 일해도 부를 늘릴 수 없는 농부들은 생산성을 개선할 동기도, 관개시설에 투자할 여력도 없었다. 전체적으로 농업 생산량이 감소하고 침체되어 있었다.

    해방 이후,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는 미 군정 산하로 몰수되어 농민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적절하게 유상분배되었다. 기존 대지주들이 거두던 소작료도 1/3까지 떨어트리며 살림살이가 나아졌고 개인 땅을 가진 농민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농업생산성을 극적으로 올리는 계기가 되었고 그렇게 발전한 농림어업은 1950대 우리나라 경제 성장을 주도하게 된다. 

    당시 미군이 강력한 통치기구와 점진적인 토지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속마음은 대한민국이 공산화되지 않기 위해 빠르게 손쓴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한국 경제 활성화에의 큰 초석을 마련해 주었고 농가 소극 증가로 연결되었다. 사회 전반적인 교육률 높아져 당시 남자 80%, 여자 94%에 달하는 무학력자 비율이 점차 개선되었다. 더불어 농업 생산성이 올라가며 풍족해진 탓에 여유 인력은 도시로 이동해 제조업에 뛰어들 수 있었다. 

     

    제조업의 힘, 대한민국을 일으키다

    우리나라가 수출 중심의 공업화에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1960대부터다. 농림어업의 성장으로 꾸준히 올라가던 경제 성장이 '산업화'대열에 오르며 폭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많은 나라가 산업화에 실패하거나 시도조차 못하는 중진국 함정에 빠진다.  인구 과잉으로 인한 낮은 임금과, 비싼 자본이 대표적인 이유인데 부강한 영국과 중국이 다른 길을 걷게 된  이유를 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인건비가 매우 비싼 영국은 자본은 매우 저렴했고 비싼 노동력을 대신하기 위해 18세기 빠르게 산업혁명을 이룰 수 있었지만 인구수가 많아 저렴한 노동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던 중국은 굳이 생산성을 높이려는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로 인해 산업혁명 대신 값싼 노동력으로 경제 외형을 이루는 근면혁명을 이루게 된다. 근면혁명은 산업혁명과 달리 수확체감으로 생산성에 한계가 명확했고 그만큼 경제 성장도 더딜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에 수출 중심 제조업이 적극적으로 육성되면서 농업 생산의 한계를 넘어 폭발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다. 당시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부가 제조업 육성 정책을 밀고 나갔다. 수출을 망설이는 기업들에게 당근으로는 ‘저금리’ 정책을 쓰며 적극 유도했는데 당시 사채 금리가 40~60%를 찍던 때에 수출 기업들에게는 대출 금리를 1966~1972년까지 6%로, 1976년까지 8%대 수준으로 제공했다. 수출 실적만 낸다면 시장금리보다 50% 이상 낮은 저금리로 기업들에게 대출을 해준 것이다. 하지만 실적 미달인 기업은 가차 없이 채찍을 휘둘렀다. 성공적인 기업에 강제 합병시키거나 자금을 회수하고 파산이라는 제재를 가했던 것이다. 

    출처: 책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

    물론 이런 당근과 채찍만으로 우리나라가 성장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운이 상당이 좋았다. 당시 베트남 전쟁과 물류혁명 등으로 거대한 시장이 열리며 수출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베트남 전쟁 보급물을 나르기 위해 미국의 컨테이너선이 보급물을 내리고 돌아가면서 빈 선박에 일본, 우리나라, 타이완의 저렴하고 질 좋은 물건들이 가득 실어갔다. 미국은 질 좋고 값싼 물건을 써서 좋았고 동아시아 세 나라는 제조업을 육성해 산업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도미노처럼 찾아온 위기

    폭풍처럼 성장하던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을 ‘한강의 기적’이라 부르며 자랑스러워했다. IMF가 터지기 전까지는. 1945년 이후 독립한 국가들 중 1인당 국민소득 ‘1만 4천 달러의 장벽’을 돌파한 나라는 우리나라와 타이완 두 나라뿐이다. 이렇게 활발하게 무역을 이어가며 호황의 길을 걷던 어느 날 태국, 홍콩,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의 연쇄적 '외환 위기'로 우리나라도 직격탄을 맞게 된다. 1997년 7월 2일 태국의 고정환율제도가 변동환율제도로 바뀜에 따라 태국 바트화의 시세가 폭락한 것이 동아시아 금융 위기의 직접적인 계기였다. 그 위기 속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외환관리 정책 실패로 결국 'IMF 사태'의 환란에 빠지게 된다.

    동아시아 외환위기가 대규모 경상 수지 적자로 이어지며 금리 인하되었고 외국인 투자자들의 돈이 빠져나가면서 환율이 오르기 시작했다. 만약 지금처럼 변동환율제도를 채택했더라면 환율이 급등하면 우리 상품 가격이 경쟁력이 생겨 수입 감소와 수출 증가로 인해 구제금융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고정환율 제도를 채택하고 있었고 환율 유지를 위해 당시 보유하고 있던 외환을 시장에 팔아 자국의 통화를 거둬들여야 했다. 그로 인해 시장에 통화 공급이 감소하며 디플레이션에 빠지게 되었고 내수 수요 또한 감소하게 되었다. 

    이렇게 미숙한 외환관리로 인해 결국 그해 11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게 되었고 IMF 권고사항에 따라 금리가 25%까지 올라가며 한국 경제가 줄줄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당시 한국 사회는 혼란 그 자체였다. 끝없이 오르던 주택 가격은 끝을 모르고 하락하고 반대로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가파르게 올랐다. 환율 급등으로 석유, 도시가스 가격 또한 올랐고 수입에 의존하고 있던 생산구조도 더욱 힘든 상황이 이어졌다.

     

    안정자산 '금'을 모으자!

    당시 대한민국의 부채를 갚기 위해 온 국민이 힘을 합한 '금 모으기 운동'이 국제사회에 크게 회자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외환 부채가 약 304억 달러였는데 이를 갚아나가기 위해 한 매체의 시작으로 금모으기 운동이 일었고 전국 약 351만 명이 참여하여 약 21억 3천 달러어치의 약 227톤의 금이 모였다. 

    1971년 미국에서 발생한 '닉슨 쇼크' 이전에는 통화 공급이 금의 공급으로 결정되는 금본위제 시대였다. '금' 자체가 세계 통화 기준이었던 만큼 그 보존성과 사용 가치로 지금까지도 가장 안정적인 자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당시 온 국민이 집에 모셔둔 금 목걸이, 금 팔지, 하다못해 금 이빨까지 기꺼이 내놓으며 다 함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힘을 모았던 것이다.

    국제사회의 위기를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함께  IMF로부터 받은 지원을 3년이나 앞당겨 상환할 수 있었다. 1998년 12월, IMF 긴급 보관 금융에 18억 달러를 상환한 것을 계기로 대한민국은 금융 위기로부터 서서히 빠져나갔고 2001년 8월 23일, IMF 위기를 겪은 지 2년 만에 대한민국에 대한 IMF 관리 체제를 종료할 수 있었다. 

     

    근데 정말 우리나라...망해요..?

    서론에서 말한 것처럼 서론에서도 언급했듯 치솟는 부동산 가격과 불안정한 해외 시장 등 미래 경제를 걱정하는 여론이 많다. 앞으로의 일은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1997년의 뼈저린 교훈은 우리에게 깊숙이 남아있고, 그 영향인지 우리나라 경제 수치는 걱정보다는 꾀나 안정적이다. 현재 한국 상황은 대외 채무 잔액은 조금씩 늘고 있기는 보유액 대비 그 비율은 30% 내외이며 외환보유액도 꾸준히 늘려가고 있는 추세이다. 실재 IMF 당시 정부는 외환 보유액이 300억 달러를 유지한다는 걸 국민들에게 알리며 안심시켰으나, 실상은 외환보유액의 5배를 훨씬 뛰어넘는 1700억 달러의 외채가 있었다.

    출처 : 한국은행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2018년 우리나라 연간 수출액도 상 최대인 6055억 달러로 집계되었다. 이는 70년 만의 최대 실적이며 수입도 전년대비 11.8% 증가한 5350억 달러로 사상 최대였고, 무역액 역시 역대 최대인 1조 1405억 달러를 기록했다고 한다. 10년 연속 흑자를 기록하고 있는 대한민국 무역수지는 흔들리는 해외 경제 속에서도 굳건히 잘 버티고 있는 듯하다.

    돈이 흘러간 역사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통찰할 수 있을까? 미국의 대공황과 일본의 무너진 경제, 20여 년 전 뼈아픈 IMF 사태까지 우리에게 수많은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책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에서 다룬 50대 사건들은 한 국가의 흥망성쇠에는 항상 돈의 흐름이 있었고 다양한 변수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동안의 돈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똑같은 위기에서 좀 더 성숙한 대처를 준비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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