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오늘도 바닥난 체력을 긁어모아 성과를 만든다서평 2019. 6. 30. 22:29
어제오늘 두통이 심해 타이레놀 두 알 털어 넣었다. 오늘만 네 알째인 것 같다. 컨디션이 많이 안좋았지만 두통약을 삼기며 나는 책과 노트북을 바리바리 싸 들고 동네 카페로 나온다. 오늘은 좀 쉬어야 할 것 같지만 오늘 해야 할 일과 하고싶은 일이 참 많다. 알약을 먹었으니 두통과 피로는 곧 사라지고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3개월 넘게 매주 1권씩 책을 읽고 서평을 쓰면서 나는 스스로를 좀 더 몰아붙이고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조금만 더 힘 내보자’라는 말로 나를 다독이며 내 한계를 깨기 위해 더 노력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그 과정 속에서 ‘성장'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일도 머뭇거리고 망설이던 나는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 ‘하면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은 그동안 내가 가진 자원으로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하나씩 깨고 있다. 안 하던 걸 하려니 그 과정이 정말 괴롭기는 하지만 나는 요즘 나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써 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과거 규율사회와 달리 요즘은 누구든 실력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 명령과 법칙, 의무가 강요되던 시대에서 자율성과 다양성, 개인의 능력이 인정받으면서 계급과 이념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있다. 개인이 성공할 수 있는 방법도 다양해지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꿈을 쟁취할 가능성이 열린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은 녹녹치 않다. 정말 피 터지게 노력해야 하고 끊임없이 성취해야 한다. 직장에서 일 잘 하는 것은 기본이고, 야근에 잔업에, 이직을 위해 틈틈이 포트폴리오도 관리해야 한다. 그뿐인가? 영어 공부도 해야 하고 남들과 차별화되는 취미가 있으면 좋고 식단 관리에 건강도 관리해야 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의문이 든다. 우리 꼭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야만 할까?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살아야 하지?
'누구나 할 수 있고 해내면 성공할 것이다'라는 믿음은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개인의 문제로 집중시킨다. 내가 잘하면 성공하고, 실패한 것도 내가 못해서다. 끊임없이 갈고닦지 않으면 뒤처질 거라는 부담감은 우리를 소진시키고 마모시킨다.
'번아웃'. 그래서 그런지 요즘 너무 자주 들리는 단어다. '할 수 있다'라는 믿음으로 계속 달리다 스스로를 소진시켜가며 결국 정신적으로 탈진한다. 다 타버리는 것이다. 열심히 달렸지만 개인과 사회의 기대 수준에 미치지 못한 자신을 채찍질하고 결국 열정과 성취감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거지?
우리는 할 수 없는데, 할 수 있다고 강요하는 성과주의가 문제일까? 그렇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환호할 것이다.
‘맞아. 성과 타령 지겨웠어! 나도 좀 아무것도 안 하고 좀 쉬자!’승패의 원인이 내 성과에 달려있다 보니 나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세상은 20퍼센트의 성공한 사람에 의해 돌아간다고 하지 않던가? 남들보다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높은 성적을 얻어서 20퍼센트 안에 들기 위해서는 경쟁해야 한다. 공동체가 뭐가 중요한가? 일단 내가 성공하고 봐야 하는데. 아마 그렇다고 한다면 성과주의는 성공을 위해 타들어가고 있는 우리를 더욱 혼자로 고립시키고 말 것이다.
성공을 근시안적으로 보면 이기적이고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서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멀리 보면 그런 사람들은 결국 한계에 도달할 것이다. 우리는 혼자만 잘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 이타적이고, 공동체를 생각하고 남을 도와주는 일에 기쁨을 느낀는 사람이 성과도 좋고, 성공할 확률이 더 높다. 사람들을 돕고 좋은 영향력을 주면 더욱 성공할 수밖에 없고 좋은 영향력을 주려면 실력이 있어야 한다. 성과주의는 타자와 멀어지게 하지 않는다. 우리가 성공하려면 타인이 꼭 필요하다. 타자와의 관계가 없는 상태에서 성과를 이루기는 불가능하다.성공의 기준이 나에게 있지 않고 외부에 있을때 우리는 힘들어진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외부의 자극은 가변적이고 내 의지와는 상관이 없다. 이는 우리를 소모시키고 좌절하게 하며 결국은 무기력하게 만든다. 성공과 성취의 기준은 나에게 있어야 한다. 남들이 다 하는 영어 공부, 남들이 다하는 취미 따라 할 것이 아니라 정말 내가 원하고 내가 성취해야 할 것에 기준을 맞춰야 한다. 남들이 미디어에 쏟아놓은 그들의 꿈을 탐색할 시간에 사색하고 나 자신과 진실을 탐색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공의 기준은 내가 세우는 것이다.
생각과 현실의 괴리는 우리를 더욱 우울하게 만든다. 생각은 저 앞에 달리고 있는 내가 있는데 내 눈은 핸드폰을 향해있기 때문이다. 정보의 파편들에 정신팔려 생각할 능력을 도둑맞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과잉에서 의식적으로 멈추고 선별할 수 있는 진화된 인간이다. 의식적은 몰입이 없기 때문이지, 성과주의가 문제가 아니다. 핸드폰, 디지털 기기의 발전으로 집중하는 능력, 멀티태스킹이 문제가 아니라 얕고 빠른 정보의 파편과 의식적 의식(인식?)의 부제다. 오히려 짧고 빠른 과잉 주의로는 성과를 이룰 수 없고 성공할 수 없다. 그러니까 내 말은, 성과 주위로 피곤한 것이 아니라 과도한 자극, 정보, 충동으로 자아가 아닌 외부에 주위를 기울이고 그 기준으로 나를 평가하기에 우울해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데 집중한다. 영어공부가 탐이 나지만 (아직) 하지 않는다. 운동도 지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살도 빼지 않는다. 지금 나의 성공은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하지 않는 일을 만드는 것은 다른 성과를 위해서이다. 나는 실제로 내가 할 수 있고, 해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우울한 일상들을 극복해나가고 있다. 평소보다 잠을 잘 못 자고 맘 편히 쉬는 날 없이 계속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하니 피곤하기는 하지만 무기력하던 일상이 활력이 생겼다.
내가 독서를 하고 서평을 써서 내 블로그에 올리는 일이 나의 성과고 내 실력을 쌓는 일이긴 하지만 내 글을 보고 누군가는 정보를, 희망을 얻는 것을 보았다. 내가 더 많은 것을 쌓으면 내 꿈도 이룰 수 있지만 더 많은 사람들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희망차고 미래가 기대된다 이것이 타이레놀을 먹으며 움직이는 나의 동력이다.책 '피로 사회'에서 한병철 작가는 현대 사회 피로와 신경증의 원인을 성과주의에서 찾고 있다. 성과를 위해 공동체가 뒷전이 되고 '할 수 있다'라는 긍정의 과잉이 결국 개인을 신경증으로 치닫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성과주의가 신경증과 이기주의를 부추기지도, 자기 착취의 사회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컴버터블존(comfortable zone)을 벗어나는 것은 폭력적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컴버터블존을 벗어나야 진화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의 상처는 아물고 치유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성장하고 조율하며 밸런스를 맞춰 한 단계씩 올라간다.
성과주의는 우리에게 기회고 선물이다.이 글은 대교가 후원하고 체인지그라운드가 운영하는 독서모임
'씽큐베이션' 2기에 참여해 작성한 첫 번째 서평입니다.'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을 놓고 싶지는 않지만 캠핑은 가고 싶어 (1) 2019.07.13 똑같은 직장에서 더 행복하게 일하는 법 (1) 2019.07.07 나의 우주, 우리 엄마. 나는 그 품을 떠나왔다 (0) 2019.06.27 유전자에 새겨진 내 삶의 의미 (0) 2019.06.20 나의 고객이 지갑을 여는 곳은 따로 있다 (0) 2019.0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