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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전자에 새겨진 내 삶의 의미
    서평 2019. 6. 20. 18:32

    생각이 과하게 많은 나는 종종 현자 타임이 오곤 한다. 인생무상, 다 덧없어 보이는데 그럴 때면 나는 철학자가 되어 "우리가 살고 있는 목적은 무엇일까? 인간은 왜 존재할까?"라는 무의미해 보이는 질문들을 한다. 불교에서 인생은 일종의 '고통의 바다'라며 삶은 고통이라고 했다. 인간은 왜 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나에게 종교는 없지만 삶이 고통이라는 말이 정말 큰 공감이 간다. 살아가며 행복과, 즐거움, 고양의 순간도 많지만 굳이 그 순간들을 위해 이렇게 괴로운 인고의 시간을 살아내야 하는 것일까?(물론 나는 내 삶에 매우 만족하고 있다.)
    나른하게 누워 멍 때리는 치코(우리 집 고양이)를 보며 ‘치코는 뭘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라는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나는 무교지만 기독교에서는 우리 모두 주님의 계획 안에서 살아간다는데 나는 세상에 어떤 역할을 하기 위해 왔을까 그 이유를 추측해보기도 한다. 나 말고도 이 글을 읽는 모든 이가 이런 고민을 한 번쯤 해보았으리라 믿고 싶다. 

    우리집 사랑둥이 치코

    다행히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수많은 철학자들과 과학자, 심지어 예술가들까지 인간의 존재 이유와 삶의 목적에 대해 수많은 고민들을 한 것 같다. 후기 인상파 화가 폴 고갱의 그림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에서 나와 같은 고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험난한 여정 속에서 우리 인간의 존재 의의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한 폭에 그림에 녹여내고 있다. 인생의 끝자락에서 그렸다는 이 그림은 폴 고갱의 나와 비슷한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에서 나온 것이리라.

    폴 고갱의 그림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그 정답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우리 인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문명의 시대를 걸어오며 철학, 과학, 예술, 종교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럴 때마다 각자의 입장에서 다른 결론에 이르렀고 우리는 약간 더 혼란스러워졌다. 물론 어느 쪽 입장이든 타당한 논리가 있겠지만 조금 더 눈에 보이는 근거가 많은 과학의 말을 빌려 이해해보고자 한다. 과학에서는 지금의 인간을 유인원을 거쳐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부터 호모사피엔스를 거쳐 탄생한 ‘진화’의 산물로 설명하고 있다.
    생물학계의 거장인 ‘에드워드 웰슨은 책 ‘지구의 정복자’에서 인간이 진화해온 과정을 추적하는 것을 통해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할 곳이 어딘지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의 존재 의의를 묻는 실존적인 질문들의 답은 우리가 헤쳐 온 역사 속에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조사하면서 과학적 증거를 통해 우리가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인지 알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앞으로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될지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고 현재를 알면 미래를 알 수 있다고 했던가? 과학계의 이야기하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을 알아가보자.


    인류의 진화 과정

    인간은 진사회성 동물이다. 여러 세대가 한 집단을 이루며 살아가고 분업으로 협력하며 이타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 '진사회성'은 인간이 생물학적, 화학적 진화하며 이뤄낸 것들 때문에 가능했다. 처음 시작은 자연 선택에 의해 우연이라고 볼만했다. 너무 작지도 크지도 않은 몸집, 잡식으로 늘어난 에너지 효율, 무리 사냥, 두발 보행, 자유로운 손, 불의 사용은 인간을 고도화 시켰다. 더 나아가 정착 생활을 하고 안전한 보금자리를 만들며 분업을 통해 사냥과 야영지와 새끼를 지키는 일을 협업하면서 진사회성의 기미가 보였다. 이렇게 서로 결속력이 높아지고 집단생활을 하면서 무리를 지켜내기 위해 이타심을 활용했다. 서로의 마음을 읽고 상호작용하며 공동의 목표와 의도를 달성하기 위해 협력하는 능력은 인간에게만 있다. 침팬지와 인간이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물론 진사회성이 인간만의 특징은 아니다. 진사회성 곤충은 인류보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더 오래된 존재들이다. 그들도 탁월한 보금자리를 만들고, 먹이를 보존하며 로봇처럼 분업되어 있으며 이타심으로 집단을 보존한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작고, 불을 사용할 수 없었다. 많은 생물들이 진사회성으로 넘어오는 필수 조건 중 일부는 획득했지만 마지막 문턱을 넘은 것은 우리 선조인 호모 사피엔스 뿐이었다. 

    아프리카 지역에 한정되어 생활하던 우리의 조상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6만 년 전 아프리카를 탈출해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갔다.(아프리카 인의 유전자는 전 인류의 보물 창고다.) 이렇게 유럽, 아시아로 퍼져나가면서 인구도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유전자 서열도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점점 복잡한 형태의 문화를 창조해내면서 창의성이 폭발했다. 식물을 재배하고 애완동물을 기르기 시작한 것에 이어 장기 정착을 하게 되면서 문화적 진화를 통하 문명이 발전하였고 국가와 권력이 탄생했다. 

    과학적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의 본성은 오랜 시간에 걸쳐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의 상호작용(유전자-문화 공진화)을 통해 형성되었다. 뱀을 보면 징그럽다고 느끼는 이 '본능'은 유전과 문화의 상호작용이 자연 선택된 진화라고 볼 수 있다. 즉 생존의 본능과 환경의 선택압이 함께 작용하며 발현된 성질이 진화에 도움이 되어 선택된 것이라는 말이다.
    가장 쉬운 예로 우유를 소화시키는 효소 락타아제인데, 원래 이 효소는 유아에게만 생산되었다. 그러다 북유럽과 동아프리카에 목축이 발달하며 우유를 계속 마실 수 있는 문화가 형성되었고, 어른이 되어도 락타아제를 계속 생성되는 돌연변이가 퍼지게 되었다. 우유와 유제품은 가장 생산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인류의 식량이 되면서 생존과 번식 면에서 엄청난 이득이었다. 효소 락타아제는 자연 선택된 것이다.
    이와 같은 유전자-문화 공진화는 근친상간을 피하거나 공포증 습득, 언어, 색을 인지하는 능력에서도 보인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복잡한 상호작용의 진화가 우리 마음과 언어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이로 인해 기술 지능, 사회적 지능, 자연사 지능 등 다양한 지능이 발달할 수 있었다.

    또 하나 인간의 특징은 다른 동물보다 장기 기억을 사용하는 능력이 더 뛰어나다는 것이다. 장기기억을 잘 사용한다는 것은 저장된 기억들을 연결해 새로운 형태, 추상 개념(원격 표상)과 비유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진사회성과 더불어 장기 기억 활용 능력은 인간을 더욱 똑똑하고 창의적으로 만들었다. 미래의 시나리오를 창작할 수 있으며 추상적인 것을 상상할 수 있었다. 인류가 복잡한 문화를 이룰 수 있던 힘은 집단 내 단결과 협동으로 경쟁 집단의 행동을 예측해 생존하는 전략을 취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집단에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를 느끼는 것이다.

    이런 장기 기억을 통해 추상적인 것을 상상할 수 있는 인지적 지능의 진화는 인류에게 신을 선물했다. 당시 자연 현상의 무지로 가족의 갑작스러운 죽음, 자연재해 등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은 '신'이라는 존재를 탄생시켰다. 애초의 종교의 목표는 개인을 부족의 의지와 공익에 복종시키는 목적으로 탄생했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사회 안정을 위해 신들이 맡은 책임도 늘어났다. 그래서 그렇게 종교에서 굴종과 예속을 강조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종교는 지도자 임명, 법 준수 등 공동체 행동을 신성화했고 사회 질서를 잡았으며 개인의 안전을 보장해주었다. 종교는 그러면서 도덕적 개념이 더해져 인간 존재 의의를 찾기 위해 창조 신화를 만들었다.

    인간에게는 집단 선택(집단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이타성)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다수준 선택(집단 선택과 개체 선택의 조합) 쪽으로 진화하게 된다. 즉 이기적인 마음과 이타적인 마음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이런 진화는 집단과 집단, 개체와 개체, 집단과 개체라는 복잡한 다수준 선택을 통해 생겨났다. 이는 우리에게 모순된 감정을 느끼도록 하였고 갈등과 충돌 속에 살아가도록 진화한 것이다.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을 가뿐하게 뛰어넘어 선과 악을 둘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개인과 개인은 경쟁하고 시기할 수 있지만 개인과 집단에서는 이타심이 발휘한다. 이건은 본능으로 진화해 내가 속한 집단을 보존하고 확장할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이런 본능으로 인간은 전쟁을 끊임없이 이어왔다.) 재미있는 것은 이기적 개인이 이타적 개인을 이기는 반면, 이타주의자들의 집단은 이기주의자들의 집단을 이긴다는 것이다. 인간은 혼자만으로도, 공동체만으로도 존재할 수 없는 개인과 공동체 모두 인간의 조건인 것이다. 



    과학이 이야기하는 인간은 어떤 존재이고 어디서 왔는가를 살펴보면 허무해진다. 위대하고 유일 무의할 것 같았던 인간이 운과, 환경에 적응하며 진화의 산물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누구는 그런 과정 모두 인간이 '선택'받았기 때문이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앞전에서 말했듯 우리는 진화하기 적절한 선적응 개체였을 뿐이다. 연속된 돌연변이와 모든 실체와 과정, 우리의 감정과 행동 심지어 자유의지까지 물리학과 화학의 법칙을 따르며 자연 선택을 통해 진화한 것이다. 그럼 우리의 목적은 단순히 감정도 없는 유전자를 운반하는 운반 기계에 불과한 것인가 하고 말이다.

    좌절하지 말고 우리의 본능과 감정, 자유의지까지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을 곱씹어 생각해보면 우리는 생각보다 개인과 사회가 처한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좋으면서도 싫은 양가감정을 부정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고, 회사가 싫으면서도 소속감을 위한 희생을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 더불어 인공 피임, 동성애와 종교, 국가 간의 도덕과 윤리 규범들을 시험에 들지 않게 할 것이다. 어떤 것이 순리에 맞고 거스르는 일인지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왜 태어났는지, 어떤 삶의 목적을 가져야 하는지는 아직 과학이 답하고 있지는 못하다. 하지만 과학 지식과 기술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고 있어 앞으로의 10년 조차 예측할 수 없다. 적어도 지금 내가 남은 삶 동안에 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인 나의 삶을 더욱 행복하게 하는 것과 나의 후손들을 위해 조금 더 성장하고 진화하는 것이다. 인류는 계속해서 진화하고 더 나아갈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할 것은 우리의 유전자가 잘 이어져 더욱 진화할 수 있도록 후손들에게 적응하기 좋은 환경을 물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터전을 더 이상 파괴하고 고갈시키지 않으면서 말이다. 

    에드워드 윌슨 저 '지구의 정복자'

     

    이 글은 대교가 후원하는 독서모임 '씽큐베이션 1기'에 참여해 '지구의 정복자'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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