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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버티는 것도 재능이 필요하다서평 2019. 8. 18. 22:16
6년 전, 그때만 해도 세상 물정 모르고 앳되었을 때 얼굴만 알던 선배에게 추천을 받아 취직한 회사에서 넌덜머리가 났다. 아무리 뼈빠지게 열심히 해도 사장만 배부르는 것 같은 이 구조가 너무 싫었다.(그땐 생각이 크지 못했다.) 당시 하던 일이 영리의 극단에 있는 일이기는 했지만 계산기를 아무리 두들겨봐도 내가 얻는 건 법에 위배되지 않을 만큼의 딱 그 정도 연봉이었다. 어린 맘에 그 공을 다 먹는 것 같은 배부른 이사가 내 앞에 왔다 갔다 하니 그 꼴이 더 보기 싫었다.
나는 입사 5개월만에 작은 푸드 트럭 중고 매물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커피를 좋아하는 나는 적게 벌고 힘이 들더라도 내가 노력한 만큼 얻을 수 있는 커피 트럭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정말 진지하게 여기저기 푸드트럭 후기들과 커피 머신 매매가를 알아보며 한 달은 열을 올렸던 것 같다. 한창 취업에 열중하고 있던 내 친구들은 나의 두루뭉술한 꿈을 응원한다고 했지만 좀 더 고민해보라는 말도 함께 덧붙였다. 나의 생각을 용감하다 생각하며 진짜로 응원해주던 사람은 사내에서 유일한 말동무였던 주임님뿐이었다.
결국 현실에 굴복해 커피 트럭을 끄는 것은 무산되었지만 나는 그곳을 8개월만에 퇴사하였고 그렇게 방황하다가 한 명만 배불리는 일(?)은 하고 있지 않다. 대신 사업이 잘 될수록 소외된 이웃들을 더 많이 도울 수 있는 사회적 기업에서 만 6년 9개월째 일하고 있다. 시간이 많이 지나 회사에서 굴러볼 만큼 굴러 짬밥 좀 쌓인 친구들은 인생의 2 막을 생각하며 슬슬 그때 내 생각과 비슷한 이야기들을 한다. 커피 트럭처럼 와일드한(?) 일은 아니더라도 비교적 독립적이고 자유로워 보이는 개인 사업이나 장사를 하는 것도 좋겠다며 농담 삼아 이야기한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며 내가 익힌 것은 '존버'다. 나는 지금 한 직장, 하나의 보직에서 만 6년 9개월, 햇수로는 8년째 일하고 있다. 보는 이에 따라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이지만 나는 버티는 것 하나는 잘했다고 자신한다. 12명이 넘는 우리 그룹 안에 6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장님도, 팀장님도, 팀원들도, 심지어 다른 팀 동료들까지 모두 바뀌는 동안 나는 내 자리를 지켰다.
물론 오래 버텼다고 그만큼 내가 일을 잘했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스스로를 돌아볼 때 근무 연수에 비해 취업 시장에서 잘 팔릴 만큼 꾸준히 갈고닦았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업무 포지션도 애매하다.(적은 자본의 기업들 실무자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버틴 것은 그만큼 이곳을 사랑해서도, 사명감에 젖어서도 아니다. 지나온 날을 한 해씩 집어보면 초반 4년은 주위 동료들 덕에, 후반에는 주체적인 의사결정과 업무 진행 방식 때문이었다. 회사 생활에 넌덜머리가 나게 했던 첫 직장의 악몽을 잊게 해준 맘씨 좋은 동료들이 이 곳에 발붙이게 해주었고, 계속되는 팀장의 부재와 잦은 교체로 인해 주체적인 업무 진행이 가능했다. 여담이지만 동료들과 너무 잘 지내다가 결국 그중 한 명과 눈이 맞아 사내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렇다. 6년 9개월 동안 근무하며 제대로 팀장님과 합을 맞춰 일한 것은 3년 정도 되는 것 같다. 물론 팀장직이 있었던 것은 1~2년 정도 더 되지만 유명무실했고 그 덕에 나는 타의적으로 내 업무 너머까지 보아야 했다. 그것이 나와 잘 맞았다. 나는 어떤 일을 할 때 계획에서부터 참여해야 직성이 풀렸고 그런 나에게 팀장 대신 킥오프 회의에 참석할 기회가 많은 것은 행운이었다. 실무자는 실행만 잘 하면 그만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아니었다. 아무런 전후 설명 없이 일만 띡- 던져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분이 안 풀려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업무를 주면서 적절하지 않은 대우라고 생각했다. 나는 상사나 매니저가 개입하지 않아야 기분 좋게 일할 수 있는 타입이었다. 최근에 깨달았지만 팀장의 부재는 나에게 일하기 최상의 컨디션이었던 것이다.
물이 흘러가듯 시간이 흘러온 것 같지만 나는 이렇게 정의되고 있었다. 나는 사회에 뛰어들어 처음 겪는 치열함에 겁먹고 더 나은 곳으로 이직하려 하기보다는 '내 일'을 하고 싶어 했다. 누군가에게는 기둥이 없어 불안하고 혼란스러워 나가떨어질 때 나는 좋다고 신나서 일을 했다.일이 힘들 때는 한걸음 물러나 동료들과 소모임도 하고 탁구도 치며 그 시간들을 견뎠다. 한 사람의 강점은 이렇게도 발현된다. 강점은 꼭 거대한 성공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버텨내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한다. 돌이켜보니 내가 가진 강점들이 힘들고 고단한 일상을 버틸 수 있게 해주었다.
미국 네브래스카 대학교수이자 심리학자인 도널드 클리프턴 박사는 40년간에 걸쳐 인간의 강점을 연구했다. 그는 '스트렝스 파인더 2.0'을 개발해 개인의 강점을 34가지 테마에 맞춰 발견할 수 있는 진단을 내놓았다. 그는 노력하면 뭐든 이룰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강점에 에너지를 쏟아부으라고 조언한다. 약점을 보충하는 대신 강점에 더 많은 투자를 할수록 재능이 효과를 배가시키고 자신의 최대 잠재력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나도 '스프렝스 파인더'를 통해 처음으로 나의 강점 5가지를 발견했다. 내가 그동안 알게 모르게 키워오고 있던 강점도 있고, 전혀 살리지 못한 잠재력도 있었다.
커피 사랑을 넘어, 이제는 없으면 정신을 못 차리는 커피 중독 수준이지만 나는 더 이상 커피 트럭을 찾아보지는 않는다. 너무 포괄적인 나의 비전이 현실에서는 매우 허황되고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6년 전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내 일'을 독립적으로 하며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것. 현실의 벽을 깨고 언젠가는 도전할 과제이다. 내가 가진 강점을 알았고, 꿈을 현실로 당겨오기 위해 어떤 자원을 투자하고 어떤 동료를 옆에 두어야 하는지 그림이 그려진다. 도널드 클리프턴 박사의 말처럼 잠재력이 터지면 내 일상에 혁명을 가져올 수 있을까? 내 미래가 기대된다.
이 글은 체인지그라운드에서 운영하는 독성모임 '씽큐베이션' 2기에 참여해 쓴 글로
도널드 클리프턴 박사의 <위대한 나의 발견 강점혁명>를 읽고 쓴 7번째 서평입니다.'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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